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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春)’의 어원에 대한 두 가지 설 중에서 ‘보다(見)’에서 왔다는 설은 필자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통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등한 동물인 인간은 태동하는 자연의 섭리를 그저 지켜보는 ‘관찰자’의 역할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영속하는 자연의 전혀 새롭지 않은 변화 속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인 입장에서 의지를 갖추고, 전혀 새롭게 바라보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봄(春)’의 비밀은 보이는 것이 아닌 ‘보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의지의 발로이며 사유와 상상, 꿈과 희망의 발로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용감하고도 무모한 비상(飛上)은 ‘봄(春)’이 우리에게 허락한 커다란 축복이다.


‘봄(春)’을 대하는 이와 같은 태도는 필자와 예비 음악 교사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공유된다. 우리 가곡을 통해 ‘봄(春)’을 보는(見) 여정은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가득해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초기 우리 가곡에 나타난 ‘봄’의 심상은 절경이며, 기쁨처럼 보이는 ‘쓰라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인 맥락 아래에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빼앗긴 조국의 광복’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처녀-또는 늠름한 제국의 전사(戰士)-의 모습을 한 대일본제국이다. 두 개의 ‘봄’은 모두 ‘봄’의 상징-만물의 소생, 희망과 생명의 의지-을 노래하지만, 곱게 감춘 부분을 들여다보면 이내 소름이 돋는다. 하나의 봄에는 피와 땀으로 젖은 민중의 저고리 냄새가, 다른 하나의 봄에는 진한 사쿠라의 향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봄은 자연의 순리대로 ‘안에서부터 용솟음치는 것’인, 반면 다른 하나의 그것은 ‘밖에서 억지로 심어진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들여다보려는’ 의지의 발로로, 이념과 사상이 다른 두 부류의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러나,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적인 것은 대표적인 친일 부역자 ‘홍난파(1898~1941)’와 ‘현제명(1903~1960)’을 비롯한 한국 가곡계의 큰 별이라 불리우는 인물들의 경우는 사상전향 전과 후-그리고 해방 전과 후-의 곡들에서 두 개의 ‘봄’ 심상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흩어진 민족을 한 데 아울러 해방 쟁취하려 노래하는 봄과 분열과 팽창을 노래하는 봄은 본질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 극히 이질적인 두 개의 봄이 한 사람에게서 나온 데는 한순간에 삶의 이정표를 뒤바꾼 일생일대의 사건이 배후에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악랄한 일제의 고문이건, 인간의 명예와 권력욕을 자극하는 일제의 강렬한 유혹이었던 간에 말이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두 개의 봄은 서로 뒤엉켜 하나가 되고, 한 인간은 두 개의 인격을 갖게 된다. 이렇게 우리 가곡의 한편에 자리 잡은 ‘봄(春)’을 들여다보노라면 봄은 역사 속에서 기억되는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로 소환된 봄이 된다. ‘봄’ 노래는 시간을 거스르는 타임머신이 되어 역사의 현장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한 사람은 직접 ‘봄’ 노래를 부르며, 다른 이는 그것을 들으며, 또 다른 이는 그 노래를 가르치고 비평하며, 바로 그 역사의 현장 속에서, 홍난파와 현제명이 되고 친일 부역자가 되며 정반대 편의 민족음악 계열 작곡가가 되어 싸우기도 한다. 생생한 역사의 현장 속 주인공이 되어 ‘나에게 봄(春)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가?’ 깊이 사유하게 한다. 그리고, 온몸으로 고백하게 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필자와 함께하는 예비 음악 교사들의 노래에는 존귀한 ‘생명력’이 부여된다. 봄의 심상이 살아서 눈에 보이게 되고, 심상이 일으킨 감정은 부르는 이와 듣는이의 영혼을 전율하게 한다. 봄을 고백하며 ‘지금, 이 순간’은 처절했던 역사의 장면으로 생생하게 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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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현재 중등 음악 교과에는 이처럼 보이지 않고 숨겨진 ‘봄(春)’을 전혀 새로운 상상의 발로로 보려는 시도와 노력이 전무하다. 두 개의 봄은 교묘하게 아름다운 치장을 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가곡을 배우고 가르치는 데 있어 순수한 봄의 심상에 국한된 ‘봄(春)의 노래’ 부르기는 우리를 편협한 역사적 시각을 가진 자로 만들 뿐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실제로 이러한 위협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은 경술국치의 치욕 112년을 맞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언제나 우리 삶의 한복판에 교묘하게 숨어,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를 분열하고 대립하게 한다. 우리의 삶과 음악과 문학, 그리고 역사는 ‘봄(春)’을 전혀 새롭게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삶’이라는 하나의 맥락 위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시도는 디지털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음악교육의 숙명이며 문화 융복합 연구의 커다란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음악 교과서에서 친일의 잔재를 제거했던 지난날의 노력은 역사 바로 세우기가 지향하는 바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감춰진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 가르치고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이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필자와 예비 음악 교사들은 이것을 미래음악 교육의 과제라 믿고 ‘봄(見)의 노래’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혹독한 추위와 소멸을 견뎌내면 봄은 해마다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러나 다 같은 봄은 아니다. 누군가의 봄은 ‘고귀한 죽음’이고 누군가의 봄은 ‘희생’이며, ‘쓰라린 고통’의 열매이다. 차가운 얼음장을 깨고 기지개를 켜는 따사로운 봄 햇살의 틈바구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곱게 감춰져 보이지 않던 신비로운 ‘봄(春)’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바라만 보는 것으로는 아직도 조금 모자르다. 더 잘 보기 위해서는 두 개의 열쇠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서두에서 언급한 ‘호기심(질문)’과 ‘몰입(상상력)’이다. 우리는 ‘봄(春)이 가져오는 일상적인 변화에 수시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러한 용기를 가진 자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생동하는 현재를 사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의 음악교육은 바로 이러한 대담함과 용기를 심어주는 전인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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