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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렸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풀잎들도 꽃잎들도 가지들도 더욱 청량해질까. 놀랍게도 봄을 시샘하는지 강원도에는 폭설이 내려 용평스키장에서 스키를 타는 모습을 SNS를 통해 바라보기도 한다. 필자가 사는 곳은 내장산 400고지이다. 다른 곳보다 봄이 더디 온다. 비도 많고 눈도 많고 바람도 많다. 남도 어딘가에서는 벌써 매화가 만발하고 자목련이 우아하게 피어나고 있음을 알리지만 필자가 사는 내장산 400고지 추령은 가을 감나무 구경도 못 할 만큼 서늘하다. 올겨울은 삼한사온이었다. 3일 춥고 4일쯤 따뜻하고 다시 추워졌다가 따뜻해지기를 반복했다. 다른 곳에서 따뜻한 햇살이 비칠 때 이곳은 눈이 펑펑 쏟아져서 길이 막혔다. 가끔은 며칠 동안 갇혀서 움직이지 못할 때도 많다. 필자는 이곳에서 북카페를 운영한다. 하지만 말이 북카페일 뿐 문을 열지 않는다. 손님이 예약하고 오겠다 약속할 때만 아주 가끔 열린다. 두문불출, 혼자서 북카페를 차지하고 앉아 마치 점령군처럼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이 책 저 책 훑으며 날마다 책 숲에서 산다. 이 책들도 예전 어느 때쯤에는 숲에서 아름드리 자라고 있었을 테지. 나무였을 거란 말이다. 어느 숲에서 자라다가 잘려서 숱한 화학적 공정을 거쳐 얇은 한 장의 종이가 되어 활자가 찍힌 채로 이곳까지 스며들었을까. 책 한 권을 만들어내는 숱한 종이들이 한때 나무였을 시간을 상상한다.
강의 준비를 위해 책 한 권을 찾아야 했다. 북카페 6, 7천 권의 책들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2천여 권의 메인 책장 아래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500여 권의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3시간쯤 걸려서 500여 권의 책들이 제자리에 꽂혔는데도 찾고자 했던 책을 찾지 못했다. 결국 기억에 의존해서 찾아냈는데 그 책은 북카페가 아닌 시습재時習齋, 말하자면 필자의 공부방 구석에 숨어 있었다. 기지개를 켜고 고개를 들어 스트레칭을 한다. 종일 바깥에 나가지 않고 책상 앞에만 앉아 있을 때도 있다.
오늘은 바깥 산책을 하기로 한다. 비는 그치고 풍경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이제 조금씩 파릇해지는 정원의 풀들을 밟는다. 이곳은 하늘빛 정원이다. 이곳으로 이사했을 때 한 지인이 하늘빛 정원이라고 명명해 주었다. 하늘빛 정원은 6그루의 목련 나무가 있다. 아름드리 두툼한 몸피를 자랑한다. 세월의 무게를 너끈히 견뎌낸 모습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줄을 연결해 빨래를 넌다. 봄이 지나 무성해지면 커다란 덩치만큼 그늘이 생겨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어머니의 말씀에 어느 겨울날 목련 나무의 커다란 가지 몇 개가 잘려 나갔다. 잘린 나뭇가지들은 울타리로 쓰이고 있다. 목련 나뭇가지를 타고 넘는다. 도로로 들어선다. 산책을 나선다. 곧 봄꽃들이 피어날 뒤편 야생화단지는 아직은 스산하다. 야생화단지를 지나 빈 들판을 만난다. 빈 들판에 여기저기 초록 잎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색깔이 환한 꽃들이 앙증맞게 피어 있다. 봄까치꽃이었다. 파란색과 보라색 중간 빛깔을 띤 줄무늬가 바깥에서 안쪽으로 점점 옅어지더니 중심은 하얀 속살을 보여준다.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난 꽃, 아주 자그마한, 콩만 한, 꽃이다. 고개를 숙여야 보이는 꽃이다. 무릎을 꺾어야만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꽃이다. 곁에는 광대나물도 피어 있다. 꽃이 피어난 모습이 광대들의 의상 같아 붙여진 이름이란다. 봄까치꽃은 개불알풀이라고도 불린다. 개불알꽃과는 다른 종류다. 언젠가 식물원에 가서 개불알꽃을 본 적이 있다. 난처럼 생겼는데 매우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개불알풀도 광대나물도 봄 마중하는 꽃이다. 아직 서늘한데도 화사하게 피어 비 온 뒤 맑은 눈빛으로 봄을 선사한다. 그래서 개불알풀을 봄까치꽃이라 하나 보다. 쪼그려 앉아 손톱만 한 풀들과 한참을 마주 보다 일어섰다. 길가에 나란한 은행나무들은 여전히 빈 가지를 하늘을 향해 뻗고 있다.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새집이 가끔 보인다. 나뭇가지와 마른 풀잎, 진흙 등으로 만들어진 새집은 바람이 불 때마다 낭창낭창 흔들릴 테고 비가 오면 젖을 테고 눈이 오면 눈에 덮힐 텐데도 부서지지 않고 오래 거기에 집으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터벅터벅 걷는다. 시선을 들어 산등성이를 바라본다. 겨울 산은 휑뎅그렁하지만 아직 어떤 옷도 풍성하게 입고 있지 않아 자신의 실루엣을 그대로 보여준다. 골진 부분도 언덕의 결의 방향도 보여 멀리 있어도 선명하다. 내장산은 애기단풍으로 유명하다. 가을이 되면 애기단풍은 빨간색으로 물들어 참으로 아름답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은 좁은 왕복 이차선에서도 어떻게든 차를 멈추고 붉게 물든 애기단풍 아래서 사진을 찍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환한 그들의 미소가 잔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30여 분가량의 산책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은행나무의 새집을 바라보고 봄까치꽃과 광대나물과도 눈 마주치며 건강하라 속삭인다. 나뭇가지들의 끄트머리부터 봄은 오는 것 같다. 끄트머리가 짙은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야생화단지는 지금은 갈색으로 가득하지만 조금씩 초록으로 물들고 봄부터 여름, 늦가을까지 제철에 맞는 꽃들을 피워낼 것이다. 하늘빛 정원으로 들어서며 울타리로 놓여 있는 목련 나뭇가지를 훌쩍 넘어선다.
파라솔 아래 앉는다. 마당에는 이제 하나둘 민들레가 흙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민들레를 캐고 계신다. 아직은 연하디연한 초록 민들레는 꽃 피기 전에 나물로 무쳐 먹을 수 있다. 광대나물도 꽃 피기 전에는 나물이 된다. 곧 하늘빛 정원은 무쳐 먹을 수 있는 나물들로 가득해질 것이다. 거저 피어나는 돌나물, 민들레, 냉이, 달래, 광대나물은 봄 향기 가득한 나물이 되어 밥상 위에 오를 것이다. 지난해 일본 영화 한 편을 본 적이 있다. 붓글씨를 쓰는 명인인 한 노부부의 일상을 다룬 영화였다. 노인은 늘 자신의 집 정원을 거닐었고 정원에서 피어나는 것들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살고 있는 생물들을 탐색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집 바깥을 나간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집과 정원이 오랜 시간 그의 전부였다. 그를 기록하기 위해 사진사가 오기도 한다. 그가 수십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탐닉했던 그의 정원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멀리서 비춰준다. 그가 우주처럼 생각했던 정원은 사실은 손바닥만 한,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많은 공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리고 봄은 어쩌면 늘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도착해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봄이면 늘 봄이라.
오늘 필자가 본 광대나물과 봄까치꽃, 민들레, 애기단풍, 은행나무 가지에 결연히 매달려 있던 새집도 필자의 마음속에 남아 오래오래 봄빛을 선물할 것이다.